나는 몬스터 헌터 2ndG(2008)부터 몬스터 헌터 라이즈(2021)까지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몬헌을 해왔다.

그리고 썬브레이크부터 더 이상 몬스터 헌터 시리즈를 구매하지 않는다.

요즘도 가끔 와일즈 나왔는데 안 할 거냐는 질문을 받는데...

 

만약 당신이 정말 좋아해서 돈만 생기면 가던 일식집이 있었다고 해보자.

어느날 그 가게가 상호명만 같은 (그리고 간판이 좀 더 화려한) 양식집으로 리뉴얼했다.

음식 완성도도 높고 맛도 괜찮고 사람도 전보다 붐비지만 그래도 그 일식이 계속 생각 날 수밖에 없다.

 

몬스터 헌터 구작과 신작은 그런 차이를 지닌다. 즉 '장르가 바뀌었다'

 

턴제 액션 게임

 

2022년에 몬헌을 관두면서 썼던 표현인데, 몬스터 헌터 구작은 '턴제 액션 게임'이다.

무슨 황당한 소리냐 싶을 테니 좀 더 자세한 설명을 해 보겠다.

 

몬스터 헌터 구작에서는 헌터의 행동도, 몬스터의 행동도 매우 느리며 캔슬이 안 된다.

예를 들어 '물약 먹기' 행동이 있다. 헌터는 물약을 꿀꺽꿀꺽 마신 후, 양 팔을 쳐들고 소위 말하는 '헌터 자세'를 취한다. 이 행동은 캔슬이 불가능하여 중간에 공격이 들어올 경우 속절없이 맞아야 한다.

한손검, 쌍검 등 가벼운 무기의 단타가 1턴 정도라고 치면 이 행위는 약 3턴이 걸린다.

즉 물약을 마시려면 앞으로 3턴 안에는 몬스터의 공격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긴 무기의 단타는 2턴, 고기 먹기는 4턴, 숫돌질은 짧게 잡아도 5턴이 된다.

1턴짜리 행동이라고 방심할 수도 없다. 몬스터의 행동과 내 행동이 겹치면 우선권은 몬스터에 있다.

 

몬스터에게도 이는 똑같이 적용된다. 리오레이아의 브레스는 선후딜 포함 4턴 정도 되고, 헌터는 리오레이아가 브레스를 쏘는 동안 몇 대는 가뿐히 때릴 수 있다.

 

이렇게 내 턴과 몬스터의 턴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겨루는 게 몬스터 헌터 시리즈의 핵심이다.

 

실시간 액션 게임과 턴 파괴

 

그렇다면 월드 이후의 신작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신작은에서 물약 먹기나 숫돌질, 투척 등 기존의 긴 행동들은 대부분 캔슬이 가능하거나 매우 짧아졌다.

이런 부분은 캔슬이 가능한 실시간 액션 게임에 다가갔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턴 파괴라는 표현도 사용하고 싶다.

이 '턴 파괴'의 첫 단추는 바로 몬스터 헌터 4의 '탑승' 개념인데, 단차 공격을 몇 번 성공하면 몬스터에 탑승해서 간단한 미니 게임을 하고 미니 게임에 성공하면 긴 시간 몬스터를 그로기 상태로 만들 수 있었다.

미니 게임을 하는 동안 몬스터가 발광하기 때문에 딜로스가 발생해서 현재에는 거의 쓰이지 않지만 당시 거의 10턴 이상의 프리딜 타임을 벌어주는 탑승은 헌터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발동 조건도 까다로운데 그게 어때서?' 싶겠지만, 4에서 헌터들은 조금만 어려운 몬스터가 등장하면 단차 공격이 쉬운 조충곤을 들고와서 탑승만을 노리는 꼼수 플레이를 하곤 했다.

정교하게 설계된 턴제는 이렇게 단 한 개의 턴 파괴 요소만으로도 쉽게 무너진다.

 

몬스터 헌터 월드에서 한때 논란이 되었던 '부동 복장'이나 아이스본, 와일즈의 '클러치 클로' 등 이러한 턴 파괴 요소 역시 실시간 요소만큼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몬스터의 생태, 그리고 헌터의 생활

 

장르 변화와 그로 인한 난이도 하락이 구작과 신작의 가장 큰 차이지만, 그 외에도 굵직한 변화가 많다.

상시 천리안 및 페인트볼 삭제, 채집의 간소화, 이동의 가속화, 대미지 표시 등등...

기존 몬스터 헌터 시리즈를 좋아하지 않는 유저들이 '시간 낭비'라고 여길 만한 요소들은 싹 다 제거했다.

 

하지만 그런 '귀찮은' 요소들에도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만약 페인트볼을 통한 몬스터 위치 추적이 안 될 경우 헌터는 생태를 통해 위치를 추론했다.

체력이 떨어진 상태라면 둥지로 가서 잠을 잘 것이고, 스태미나가 떨어진 상태라면 물이나 먹이를 먹을 수 있는 장소로 갈 것이다. 동굴에 사는 몬스터는 동굴 위주로 이동하고, 날아다니는 몬스터는 개활지 위주로 이동한다.

 

몬스터가 다른 장소로 이동한 후 그 장소에서 채집을 하며 한숨 돌리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었다.

친구들과 노가리 까며 수렵하다 채집도 하고, 필요한 아이템도 나눠주고, 고기도 구워 먹는 게 헌터의 일상이었고 절대 몬스터만 쫓아다니면서 패는 게임이 아니었는데, 그런 요소들이 다 사라지니 더 이상 헌터들은 왜 몬스터가 귀찮게 이동을 해대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구작에서는 대미지 역시 표시되지 않았는데 타격감에 확실한 차이를 둬서 내가 약점을 때리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몬헌다움?

 

'몬헌다움'이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인터넷 커뮤니티 활동을 안 해서 이 단어가 어디서 어떻게 기인했는지는 모른다.

현재는 몬스터 헌터 구작의 불합리함과 그에 쓸데없는 자부심을 느끼는 헌터들을 비꼬는 표현으로 쓰이는 것 같다.

확실하게 강조하고 싶은 건, 나는 불합리함을 좋아한 게 아니다. 내가 좋아했던 건 과거의 장르였고, 이젠 새로운 장르의 게임으로 거듭났을 뿐이다.

템포가 느리고 컨텐츠가 다양한 턴제 액션 게임에서, 템포가 빠른 수렵 위주의 실시간 액션 게임으로 바뀐 셈이다.

 

처음엔 이 변화를 받아들이기 싫었고 언젠가 과거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미약한 기대도 품었었지만 이제는 몬스터 헌터를 정리한 지도 몇 년이 지났다.

다만 신작이 흥하면 흥할수록 구작 유저들을 불편한 것에 부심 부리는 변태 취급하는 사람들도 늘어났고, 구작에서 신작으로의 변화를 '발전'이라고만 생각하는 사람도 많아서 껄끄러운 마음에 끄적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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