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음감은 참 쓸모가 없다.
하다못해 음악과 관련된 취미라도 지녔으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을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악기 연주나 가창, 작곡 등의 취미도 전혀 없다.
절대음감으로 얻는 이득이라곤 종종 사람들로부터 이유 모를 부러운 시선을 받는 것뿐이다.

어쨌거나 오늘은 절대음감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풀어보려고 한다.
절대음감을 가진 사람 마다 그 정도와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나의 경험이 절대적이라곤 할 수 없지만, 이 포스팅이 절대음감을 이해하는 데에 조금은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기억
내 기억 속에서, 나는 항상 절대음감이었다.
계이름이라는 걸 처음 배운 뒤로 유치원 선생님이 노래하는 동요조차 계이름으로 들렸다.
한 악기를 정말 오래 다루거나, 특별히 청음 훈련을 하면 절대음감과 비슷한 능력을 얻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어쨌든 내 경우에는 태생적 절대음감이다.

이런 이야기를 남에게 할 일은 딱히 없기 때문에 나는 고등학생 때까지도 절대음감이 흔치 않다는 것을 몰랐다. 다른 사람들도 당연히 색깔을 빨강, 파랑, 초록으로 구분하듯 음을 도레미파솔라시도로 구분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절대음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음악 관련해서 뭐라도 해볼까 하고 작곡 동아리에 들어가거나 악기를 배우는 등 여러 시도를 해봤지만 딱히 잘 되는 건 없었다.
매체 속에서는 절대음감을 가진 사람이 음악 천재로 묘사되는 일이 잦지만 실제로 절대음감과 음악적 재능은 큰 상관은 없는 것 같았다...
작곡은 음감보단 센스가 더 중요했고, 악기는 연습이 훨씬 더 중요했다.

지금까지 관련해서 가진 취미라곤 소소하게 청음해서 피아노 악보나(사실 그나마도 피아노도 칠 줄 모르고 오선악보도 잘 볼 줄 몰라 난항을 겪는다) 여러 게임에서 사용하는 MML 악보를 만드는 데에 그친다.
MML 악보들은 한때 수많은 마비노기 유저 분들이 사랑해 주셨기에, '이 정도면 충분히 절대음감을 잘 쓴 거 아닐까?'라고 뿌듯하게 생각한다.

 


청음
절대음감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음악이 어떻게 들릴지 참 궁금하다.
음악이 하나의 덩어리로 들리는 걸까? 음악과 함께 음이 들리지 않는다면 음악만 들리는 걸까?
주위 사람들에게 음악이 어떻게 들리냐고 설명을 구하고 묘사를 들어도 사실 잘 상상이 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설명만으로 절대음감이 어떤 식으로 들리는지 상상하고 이해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최대한 신경 써서 비슷하게 묘사를 해보도록 한다.

절대음감에 대해 가장 쉽게 설명하는 방법은 '곡에 음이름으로 된 가사가 붙어서 들린다'는 것이다. 물론 100% 맞는 설명은 아니지만, 한 50% 정도는 맞는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학교종이 땡땡땡~"이 들릴 때 "솔솔라라 솔솔미~"도 같이 들려오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환청처럼 '들리는' 것은 아니다(그랬으면 더 피곤했을 것 같다). 그보다는 머릿속에 바로바로 떠오르는 것에 가깝다. 복숭아 향을 맡으면 굳이 무슨 향일까 고민하지 않아도 뇌가 먼저 '복숭아'를 떠올리듯이 '도'라는 음을 들으면 뇌에 '도'가 떠오른다.

 

한 옥타브에 존재하는 12개 음 각각으로부터 어떠한 종류의 다른 '느낌'을 받는 것 같기도 하다.

사람들이 마치 빨간색을 보면 열정이나 뜨거움 등을 느끼듯이, '도'는 안정적인 느낌, '솔'은 시원한 느낌, '라'는 불안한 느낌...이라고 설명하면 비슷할까?

하지만 사람들이 삶 구석구석에서 빨간색을 볼 때마다 열정을 느끼지 않듯이, 나도 모든 '도'에서 시시때때로 안정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내게는 '도'가 그런 느낌일 뿐이다.


선율이 두드러지거나 볼륨이 클수록 음도 더 선명하게 들리고, 다른 더 큰 소리랑 겹쳐지면 헷갈리거나 잘 들리지 않기도 한다.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것과 비슷하다. 더 크게 떠벌떠벌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소곤소곤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듯이 보컬이 있는 곡에서는 코러스나 베이스의 음은 비교적 잘 들리지 않는다.

가끔 책상을 두들기면서 이런 건 무슨 음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건 나도 모른다.
소음에도 음이 있는 건 맞다. 유리잔에 물 따르는 소리나 청소기의 위이잉 소리처럼 그래도 어느 정도 규칙적이고 정돈된 소음들은 음으로 들린다. 하지만 대부분의 복잡한 파형을 가진 소음은 나도 그냥 소음으로 들린다.
(노래하지 않는 사람 목소리도 마찬가지로 그냥 사람 목소리로 들린다)
어쩌면 좀 더 섬세한 절대음감들은 이런 것도 다 음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영향
절대음감은 그다지 쓸모는 없지만, 어쨌든 24시간 365일 계속 소리가 음으로 들리기 때문에 절대음감 당사자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끼친다.

가장 크게 영향받은 부분은 음악 취향이다.
한국어 가사가 있는 음악을 선호하지 않는다. 음과 가사가 함께 들리는 것도 피곤한데, 가사의 의미까지 머릿속에 들어오면 피로감을 넘어 불쾌감이 든다.
그럼 뭘 듣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는데... 뉴에이지 등 가사가 없는 음악을 가장 선호한다.
한국어 랩이나 외국어 가사도 비교적 피로도가 낮아서 괜찮다.
(가끔 좋아하는 국내 가요는 노래방 MR을 들을 때도 있다)

가사보다 음이 우선권이 높게 들리기 때문에 가사가 있는 곡의 경우 음에 밀려서 가사를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어느 정도냐 하면, 맨날 듣는 가장 좋아하는 곡조차도 가사를 따로 주지 않으면 못 부른다.
하지만 그 곡의 보컬 음계는 완벽히 기억해서 듣지도 않고 따올 수 있다.

조성이 달라지면 같은 곡도 다른 곡으로 인지하여 잘 알아듣지 못한다.
특히 노래방에서 흔히 쓰이는 키 낮춤 기능으로 조성을 바꾸면 아는 곡조차 부르지 못하고 어버버 한다.
곡을 기억할 때 전체적인 흐름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하나하나의 음으로 기억하기 때문에 그런 듯하다.

장조와 단조를 오히려 잘 구분하지 못하거나 곡의 분위기를 남들과 다르게 느낄 때가 많다. 단조 곡이라도 속도만 빠르면 신나는 곡이라고 느끼거나... 이것 역시 곡을 전체적인 흐름으로 받아들이지 못해 생기는 현상으로 추정한다.

노래를 부르는 것을 대단히 꺼리는데, 내가 잘못 부른 음이 그대로 내게 들리기 때문에 자괴감이 든다. 적극적으로 도전해 보면 절대음감이 없는 사람보다는 유리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럴 의욕은 딱히 없다.

 

이러한 성향은 사람마다 많이 달라서, 지인 중에는 절대음감인 데에도 K-POP과 아이돌의 팬인 사람도 있으며 노래 부르는 걸 즐기는 사람도 있다. 따라서 이 포스팅의 내용을 지나치게 일반화하지 않도록 주의를 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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